지난호보기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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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행정 VS 모험행정
변화와 성장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모험행정’
2020년 5월 강남 삼성역 사거리인 코엑스 아디움 외벽에 사각 박스가 설치되었다. 그 안에서 진짜 같은 가짜 파도가 철썩였다. 코로나19로 여행을 못 가 다들 답답해하던 시절, 강남 도심 한복판에서 출렁이는 바다와 흰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는 ‘웨이브’라는 이름으로 보는 이들에게 힐링과 신비로움을 선물했다. 가상으로 넘실대는 파도가 너무나 실감 나 화제가 되었다. 그 이미지는 SNS의 피드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호기심 많은 필자는 SNS로 보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웨이브’를 보러 강남구 삼성역 사거리까지 찾아갔다. 전시를 찍기 위해 맞은편에 있는 버스정거장에서 꽤 긴 시간을 머물며 몇 차례씩 이어지는 전시를 보고 또 보고 감탄하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버스정거장 앞에 있는 치킨집에서 치맥까지 먹고 왔다. 잘 된 미디어전시 하나가 외지인을 불러들여 지역 경제에까지 기여하게 한 사례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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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전광판에 설치된 미디어아트 ‘웨이브’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K-미디어 실감영상 창작전문 스타트업 ‘디스트릭트’
디스트릭트(District/Design + Strict)는 ‘웨이브’란 미디어 작품을 선보여 대번에 화제의 스타트업으로 떠올랐다. 2021년 뉴욕 타임스퀘어에 대형폭포와 춤추는 고래를 선보이며 해외 언론에까지 등장한 데 이어 디자인 관련 해외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
디스트릭트는 지금은 핫한 기업으로 떠올랐지만 아픈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2004년 웹 디자인업체로 창업한 디스트릭트는 2009년에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 업체로 전환했다. 2011년 실감형 콘텐츠 중심의 라이브 테마파크를 경기도 고양시에 조성하려는 부푼 꿈을 꿨지만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창업주가 201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회계학을 전공했던 직원이 2016년에 새로운 대표로 취임하여 지금에 이른 그야말로 ‘존버’ 정신의 산증인인 셈이다.
되짚어 보면 코엑스의 ‘웨이브’ 전시 이후 도시의 벽, 거리의 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대적으로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 공공문화시설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팬데믹 시기까지 겹쳐 ‘웨이브’ 같은 디지털 미디어아트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서울시에서 미디어시티 서울의 비전을 꿈꾸며 만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보냈던 당시의 우려는 이제 더는 없다. 초기엔 미디어 작품을 사주는 곳이 없어서 어느 장르의 작가보다 어렵던 창작 현실이 이제 정반대로 바뀌었다. 소수의 이야기긴 하지만 미디어 작가들은 창작지원금의 단위에 0 하나가 더 붙을 정도로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
게다가 2018년 제주도에 설치된 ‘빛의 벙커’ 미디어전시 또한 대박이 나면서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현장 사진 인증을 즐기는 SNS 독자들의 니즈와 맞아 떨어져 미디어를 활용한 전시기법은 가장 대중적인 전시 방법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축제 등에서 실험적으로 개・폐막 시에 실험적으로 시도되었던 미디어 맵핑 전시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대학 내 미디어영상학과의 증가, 관련 예술 분야의 증가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백남준 시대의 실험적인 미디어 장르가 이제 대세가 된 셈이다.
도시마다 빛의 도시의 시초였던 프랑스 리옹과 MOU를 맺고 빛의 축제를 시도한다. 전국적으로 미디어전시 현황을 살펴만 봐도 빛의 도시를 슬로건으로 삼고 있는 광주는 비엔날레 전시관 벽을 미디어 파사드로 삼아 전시 중이고, 인천 개항장, 제천의 의림지, 대전의 한빛탑, 창경궁 안의 춘당지, 목포, 여수, DMZ 등등 차고 넘친다.
두 배로 넓어진 공원 같은 광장으로 새롭게 선보인 광화문 광장 또한 미디어 파사드가 중복적으로 설치된 곳 중 하나다. 이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외벽에 코엑스의 아티움에 설치된 미디어 캔버스와 유사하게 설치되었다. 문체부와 콘텐츠진흥원에서 ‘광화 시대(AGE OF LIGHT)’라는 이름으로 지난겨울부터 여러 차례 전시를 했다. 궁중축전을 비롯, 야간 개방 등 행사 때에 광화문 자체를 활용하거나 광화문 좌우로 한 긴 벽을 활용한 미디어 맵핑 작업을 선보이는 경우도 흔하다.
광화문과 노들섬 등 시내로 집중된 디지털 감성도시 서울
특히 서울시에서는 ‘디지털감성도시 서울’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광화문과 노들섬을 주요 미디어전시 공간으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벽에도 디지털 감성도시를 기치로 내 건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를 준비 중이고, 광화문 광장에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비스듬한 해치광장 양쪽 벽에도 디지털 미디어 캔버스를 준비 중이다. 해치광장 양옆의 캔버스는 차별화를 주기 위해 화면을 잘게, 혹은 길게 잘라서 새로운 차원의 영상을 선보인다고 들떠있다. 문화부는 문화부대로, 서울시는 서울시대로 서울 중심의 한복판인 광화문이 중요하다며 광화문을 무대로 미디어전시를 설치하고 있다. 앞으로 미디어전시가 광화문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구성할 모양이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광화문 앞에 서 있는데 왼쪽 역사박물관에서도 전통문양과 오방색으로 꿈틀거리며 보여지고, 오른쪽의 세종문화회관 벽에서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이 미디어로 비춰진다고 한들, 과연 조화로울까? 지하로 내려가는 동선을 따라 좌우로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사계가 다양한 이미지로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름답게 다가올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서울시 안에서도 미디어 파사드 관리 주체가 세종문화회관 쪽은 서울시 문화본부 디자인과이고 해치광장 주위는 도시재생본부 역사도심재생과 소속이다. 미디어 콘텐츠의 통합 큐레이션이 가능하면 모를까, 조정과 협력 없이 서로 자기만 성과 내겠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멀미가 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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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흥례문광장에서 열린 ‘2022 궁중문화축전’ 개막제의 미디어파사드
현대는 모범생에서 모험생으로 행정도 모범행정에서 모험행정으로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지낸 주철환 교수는 EBS 클래스e 예능인문학 특강에서 현대는 모범생이 아니라 모험생이 필요한 시대라고 일갈했다. 방송에서 편집과 편성이 필요하듯이 인생에도 편집과 편성이 필요한데, 기존 방식의 안전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새롭고, 재미나고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 본인의 기준이었다고 한다.
그 기준을 행정에도 도입해 본다면 기존 방식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모범사례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동안 전례가 없었던 상상력으로 새롭게 도전하는 모험행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적극행정이라는 용어가 있듯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동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한 번 더 고민해 본다면 디지털 감성도시로서 미디어 파사드를 광화문이나 노들섬에 집중하는 것은 지루하고 재미없다. 시민들이 일상 곳곳에서 문화예술을 즐기게 하기 위한다고 하지만 오래전부터 전시를 여러 번 한 적 있는 한강의 조각 축제를 여는 것 또한 타성적이다.
한 번도 미디어 파사드 전시가 없었던 곳, 단 한 번도 조각 전시가 이뤄지지 않았던 곳을 조사하고 상상하며, 안 해 보았던 장소에서 지금껏 문화예술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각지대의 약자들에게 접근하는 모험행정은 영영 볼 수 없는 것일까?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우, 반겨 실험해보기보다 그와 유사한 사례가 앞서 어디에 있는지 레퍼런스를 찾는 데 급급하다면 모험행정이란 그림의 떡이기 쉽다.
반면 해외 지방도시의 경우 모험행정 사례는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일본 히가시카와 사진마을이다. 히가시카와 마을은 그 지역 출신의 유명한 사진작가도 없고 멋진 자연배경을 가진 동네라는 소문도 없었다. 다만 1촌 1품 운동의 하나로 다른 곳과 유사하지 않은 것을 찾다 보니 ‘사진’이 선택되었다.
한 번 ‘사진’으로 정한 다음부터는 페스티벌과 수상 제도를 통해 ‘사진’과 직간접적인 인구를 지원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그렇게 히가시카와상을 만들고, 히가시카와 국제사진 페스티벌을 열고, 사진이 잘 찍히는 풍경 및 생활환경 조성을 추진했다. 청년인구의 잠재력까지 주목해 전국고등학교 사진 선수권대회까지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히가시카와 스토리’란 책을 보면 사진마을 선언 전문이 나온다. 지면에 옮겨본다.
지난한 과정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1985년에 시작된 사진마을 선언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그동안 히가시카와초의 경우 2014년에 약 30채에 불과했던 카페, 공방 등이 2019년엔 2배나 늘어난 60채의 상권군락을 이루었고, 인구바닥이었던 1993년(7,063명)에서 2019년(8,380명)까지 19%의 인구증가율을 기록했다. 문화의 세기라는 2000년대 이후라면 모를까, 1985년 사진마을을 선언한 것은 획기적이다. 그런 과감한 선택이 있어서 지금의 히가시카와초 마을이 가능했고, 그런 결과로 ≪소멸위기의 지방도시는 어떻게 명품도시가 되었나?≫ 책에 소개되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흔히 평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공공기관 경우 모험의 리스크보다는 지표에 충실한 모범을 지향한다. 그러나 변화와 성장을 위해선 모범 일변도보다는 모험도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가치와 비전으로 위기를 극복하라고 강조하는 지방공기업에 공공기관 대상 새로운 모험행정 지표의 신설을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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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앞 KT사옥 외벽의 미디어파사드 모습
자연과 사람, 사람과 문화, 인간과 인간 등 이런 만남에서 감동은 우러나옵니다. 틈새에 부는 바람처럼 카메라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나눌 수 있습니다. 만남과 사진이 맺어질 때 인간을 읊고 자연을 경외하는, 누구나 언어를 초월한 시인이나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히가시카와에 사는 우리는 그 멋진 감동을 만들기 위해 사계절마다 별세계를 창조하고 식물 동물들이 숨 쉬는 웅장한 자연환경과 맑고 아름다운 경관을 대대손손 지키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가꿔온 아름다운 풍토와 넓은 마을을 길러가고 은혜로운 대지로, 세계인에게 열려있는 마을을 담은 ‘사진이 잘 찍히는 마을’의 창조를 목표로 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히가시카와 사진마을 탄생을 선언합니다.
-1985년 6월 1일 홋카이도 가미카와군 히가시카와초
참고
• 문화일보 2022.6.17 디스트릭트 이성호 대표이사 인터뷰 참조
• 아주경제 2022.6.27. 주용태 문화본부장 인터뷰 기사 참조
• 2022. 월간 춤 7월호 오진이의 문화광장 글 일부 인용
• 소멸위기의 지방도시는 어떻게 명품도시가 되었나 중 p290~291 일부 인용(라의 눈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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