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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 시대,
다시 읽는 「페스트」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의 한 평범한 해안 도시 오랑에서 죽은 채 발견된 쥐 떼. 페스트가 창궐해 도시는 폐쇄되고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비극에 대응한다. 도피하거나 초월하거나 적극적으로 재앙에 맞서거나.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죽어가는 가운데 리유, 타루, 그랑, 랑베르 등 몇몇 시민들을 중심으로 자원보건대가 조직된다. 이들은 혼란 중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공동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며 변화해 나간다. 카뮈는 의사인 리유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1947년 페스트가 출간되었을 때 프랑스에서의 반응은 놀라웠다. 한 달 만에 2만 부가 매진되었고, 그해의 비평가상 수상작으로 결정됐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페스트라는 비극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며 운명과 대결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소설 페스트는 지금까지도 20세기 프랑스 문학 가운데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재난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카뮈가 이 소설을 구상해 출간하기까지는 무려 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와 죽음을 가져다주는 전염병과 같은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다. 이후 카뮈는 1941년부터 소설의 무대가 되는 오랑에 1년 반가량 거주하며 ‘페스트’에 관한 소설을 본격적으로 계획한다. 실제로 오랑 인근의 도시에 티푸스가 번져 지인이 감염된 사건과, 지병인 폐렴의 재발로 고통을 겪은 개인적 경험 등이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고 한다.
카뮈의 대표작이자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이방인’이 세계의 부정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이라면, ‘페스트’는 긍정을 드러내고자 썼다고 작가는 생전에 밝혔다. 카뮈는 1957년 스톡홀름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부정-긍정-사랑’ 세 단계로 이어지는 자신의 작품 세계의 청사진을 그려 보였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후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죽음을 맞으며 ‘사랑’을 주제로 하는 작품은 안타깝게도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다.
‘긍정’, 즉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고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희망의 의지를 보여 주는 ‘페스트’는 이별의 아픔과 죽음의 공포로 휩싸인 폐쇄된 도시에서 극한의 절망과 마주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재앙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편,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의연히 운명과 대결하는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카뮈가 말하고자 한 페스트는 단순한 감염병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부정성이며, 전염병 앞에서 절망과 맞서는 인물들은 행복과 희망에 대한 의지이자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진정한 반항이며 곧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임을 보여 준다.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페스트』중에서
카뮈 서거 60주년,
코로나19가 휩쓴 2020년
재앙과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
알베르 카뮈 서거 60주년인 2020년, 코로나 확산으로 팬데믹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감염병에 대한 대표 소설인 ‘페스트’가 다시금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주목받고 있다. ‘페스트’ 다시 읽기는 한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에서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카뮈의 소설과 코로나19에 마주한 세계의 현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쓴 지금, 모두가 처음 겪는 사태로 전대미문의 혼란 중에 있다. 언제 끝날지, 어디까지 확산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 감염에 대응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페스트’의 위대한 인물들처럼 각자 자리에서 할 일을 함으로써 사태를 함께 수습해 나가는 것이리라.
소설 속 인물 가운데 시청 공무원이자 보건대로 활동하는 그랑은 사태를 분명히 인식하는 사색형 인간도 영적 구원을 끌어내는 인물도 아니지만, 작은 일을 행동으로 옮기며 재앙에 맞서 싸우고 ‘나’에서 ‘우리’로 변화해 나가며 책임을 다하는 인물이다. ‘페스트’가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한 울림으로 다가가는 것은 눈앞에 닥친 재앙의 공포에 맞서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간 의인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염병이 헤집어 놓은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고자 애쓰는 소설 속 인물들은 코로나와 맞서는 현 시대의 의인들을 닮았다.
재앙에 마주했을 때 인간은 모두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마주치지 않고 싶은 그 무엇을 마주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우리 개인이 일상의 진보를 이뤄나가길 바라며, 막막한 이 시대에 카뮈가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로 조금이나마 위로받기를, 재앙 속에서도 빛나는 인간성을 다시금 느껴 보기를 소망한다.
“나는 다만, 이제 다시는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평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떳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페스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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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현재 민음사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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