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보기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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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듯 변하지 않은 듯,
버려진 시골집의 재탄생
한국의 옛것을 되살리며 길이 숨 쉬는 곳…
부여 규암마을 ‘자온(自溫)길’에 머무르다
예전에 봤던 형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는 의미로 ‘환골탈태’, ‘상전벽해’라는 말을 종종 쓴다. 긍정적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무분별한 개발로 고향의 옛 모습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사람들마저 변한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펼쳐지고 있는 부여군 규암마을 역시 꽤 변한 것 같지만 과거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골목길과 상점들을 둘러보자.

편집실 사진 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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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문화가 흐르는 엿바위마을
백제 멸망의 회한을 담은 낙화암을 휘감아 도는 백마강. 강 건너에는 부소산과 남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바위인 ‘자온대(自溫臺)’가 새초롬하게 숨어 있고, 바로 그 위에는 수북정(水北亭)이라는 정자가 팔작(八作) 지붕을 한껏 펼치며 봄 햇살을 듬뿍 받고 있다. 자온대 모습이 흡사 누군가를 엿보는 것처럼 머리만 조금 내밀었다고 해 엿바위(엿볼규, 바위암)라고도 불렀는데, 자온대가 감싸듯 품고 있는 나루터 뒤편 마을이 바로 엿바위마을(규암마을)이다.
자온대 아래에는 과거 시끌벅적했던 규암나루터가 자리 잡고 있다. 규암나루는 전라도에서 한성까지 가는 물건을 실어 나르던 금강 수운의 중심지였고, 일제강점기에는 군산과 강경에서 수탈한 쌀을 실은 배들이 모두 이곳을 경유해 갔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백화점과 영화관, 찻집 등이 즐비하고 오일장이 들어서는 번화가였다.
하지만 1968년 백제교가 준공되면서 규암마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여읍으로 갈 수 있게 됨에 따라 규암나루와 마을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200세대가 넘던 인구 규모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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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공예인 창작 클러스터 조성사업으로 조성된 공방인 선화핸즈(나전칠기)
옛길이 소생하는 자온길 프로젝트
쇠락한 지역을 되살리는 방법은 천차만별.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색과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수십 년간 침체의 늪에 잠겨 있던 규암마을이 봄날 새싹 돋듯이 부활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이곳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젊은 예술가의 도전이었다.
서울에서 리빙라이프 회사인 ‘㈜세간’을 운영하던 박경아 대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예술가들이 마음 편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이곳 부여로 내려왔고, 2016년 세간 직원들과 함께 ‘자온길 프로젝트’를 통해 마을재생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자온길 프로젝트’는 버려진 빈집, 빈 상가를 고쳐서 문화적인 시설로 변화시키는 사업인데, 전통공예를 전공한 박경아 대표가 전통문화 콘텐츠 타운을 조성해 한국식 리빙라이프를 체험할 수 있는 사업모델을 구상한 것이 자온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자온길 프로젝트는 이제 걸음마 단계일 뿐 10년 이상의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되고 있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듯한 자온길 풍경이지만, 언젠가는 인사동의 쌈지길 못지않은 전통문화가 숨쉬는 거리로 변할 것만 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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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특색에 맞게 전통 문화예술 콘텐츠로 채워나가고 있는 규암마을은 2018년부터 가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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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세간에는 공간 곳곳에 옛 물건들이 놓여 있고, 아름다운 전통 공예 소품들이 눈에 띈다.
담배가게에서 문화공간으로 ‘책방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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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공예와 예술 관련 책이 많은 부여 유일의 독립 서점으로 운영되고 있는 책방세간의 내부
수북정 교차로에서 자온대를 지나 규암시장 정류장 삼거리에서 마트를 끼고 우회전하면 규암우체국까지 일자로 뻗은 자온길이 나온다. 자온길 중심에는 자온길 프로젝트를 통해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프로젝트의 중심 역할을 하며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은 책방 ‘세간’을 만날 수 있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과 미닫이 출입문은 어릴 적 시골에서 흔히 보던 평범한 가게와 다름없지만, 오히려 그 평범함이 그리운 시대가 아닌가. 이곳은 오랫동안 ‘임씨네 담배 가게’로 운영됐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담배 은박지마냥 햇볕에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벽지가 방문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입구 오른쪽 공간에는 책들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공예품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데 오히려 방문객들을 호기심 가득 찬 눈빛으로 구경하는 듯하다. 중앙 홀의 서고를 지나 반대편으로 가면 아랫목의 장판지가 누르스름 익어가는 아늑한 온돌방이 기다린다. 소담한 스텐 소반과 촌스러운 방석 옆으로 동화책이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어 아이들이 요리조리 뒹굴며 놀기 좋은 공간처럼 보인다. 추억과 전통이 깃든 책방 세간을 찾고자 한다면 임씨 할아버지가 생전에 즐겨 타던 녹슨 자전거가 우두커니 세워져 있는 가게를 찾으면 된다.
지친 영혼을 달래는 쉼터 ‘수월옥’
책방 ‘세간’, 공예품 쇼룸과 숙소가 결합된 ‘웃집(규방산책)’, 카페 ‘수월옥’, 한옥스테이 ‘이안당’ 등 자온길 프로젝트를 통해 운영하는 공간들은 모두 자온길 인근에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허름하게 생겨 그냥 지나치기 쉬운 명소가 하나 있다. 심지어 본관과 별관이 있는 카페 ‘수월옥’이 바로 그곳. 차를 주문할 수 있는 본관은 녹슨 양철 지붕과 함께 페인트가 벗겨진 시멘트벽으로 인해 흡사 창고처럼 보이고, 우물을 사이로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별관은 수풀에 둘러싸이고 땅속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서 폐가로 보일 정도다.
빼어날 ‘수’에 달 ‘월’이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이곳은 한때 술과 음식을 팔던 요정이었다. 선반에 놓인 청자, 백자, 진사, 분청사기 등의 찻잔을 고르는 재미도 선사하는 수월옥의 모던한 분위기에 커피를 즐기고 싶다면 본관으로, 아늑한 한옥에서 좌식으로 즐기고 싶다면 별관으로 가면 된다.
여럿이 함께 온 손님들은 아무래도 넓은 별관을 선호할 듯하다. 상량문과 서까래, 뼈대가 모두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수월옥이야말로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온고지신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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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요정이었던 자리를 바꾸어 만든 카페, 수월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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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수월옥 별관
문화예술로 서서히 익어가는 자온길
책방세간, 규방산책, 이안당 외에도 크리에이티브 로컬 레스토랑 ‘매화에 물주거라’, ‘자온당’, 크래프트 비어 펍과 갤러리가 공존하는 문화예술공간 ‘자온양조장’ 등이 예정돼 있다고 한다. 이처럼 ‘자온길 프로젝트’는 규암마을 일대의 보전 가치가 높은 근현대 건물을 문화 공간으로 개조하고, 지역 특색에 맞게 전통 문화예술 콘텐츠로 채워나가며 마을을 재생하고 있다. 자온길이 입소문을 타면서 타지역 재생사업에 대한 컨설팅 문의도 종종 들어온다고 한다.
도시재생법에 따르면, 도시재생이란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 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 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창출 및 지역 자원의 활용을 통해 경제적·사회적·물리적·환경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을 말한다. 도시 쇠퇴에 대응해 물리적 환경개선(H/W)과 주민들의 역량 강화(S/W)를 통해 도시를 ‘종합 재생’하기 위한 뉴딜사업이 유형별, 규모별로 지역 곳곳에서 추진되고 있다.
규암나루 뒤편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두어 시간 자온로를 포함해 규암마을을 산책하다 보면 옛것의 가치와 도시재생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도시재생이 쇠락한 지역을 되살리고 사람들의 끊어진 발길을 다시 잇는 것이라고 할 때, 자온길은 문화예술 콘텐츠가 지역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콘텐츠는 거창한 문화시설이나 통 큰 자본력만을 가리키진 않을 것이다. 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극장, 다방, 담뱃가게처럼 허름해 보이지만 우리 일상의 스토리를 간직한 평범한 흔적들이 아닐까.
트래블 가이드 in 부여 규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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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옥
1962년 주막집과 요정으로 사용되던 공간을 개조해 트렌디한 카페로 꾸몄다. 양옥과 한옥, 다른 느낌의 건물 두 곳이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좌식 공간에서는 더욱 프라이빗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청자와 백자, 진사 등 커피와 차에 쓰이는 도자기잔 모두 국내 도예가의 작품이다.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수북로 37
운영시간 : 화~일 10:30~19:00, 월요일 휴무
전화 : 041-837-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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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세간
과거 담배가게였던 곳을 개조해 만든 부여의 독립서점. 주인장이 큐레이션한 책을 읽으며 안방에 앉아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책방세간에서 도보 5분 거리 안에 부여서고, 수월옥, 이안당, 전통공예품 숍인 편지, 다시 봄 베이커리 등이 모여 있다.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자온로 82
운영시간 : 10:30~19:00,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5분 거리에 위치
전화 : 041-834-8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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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서고
부여서고는 부여의 '한국전통염색교육원'에서 공부한 공예가들이 문구류, 도자기, 패브릭 등 다양한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하는 편집숍이다. 개성 넘치고 정성 가득한 작품들로 볼거리들이 제법 많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비닐 사용을 자제하기 위해서 어머님들이 서예 연습을 한 화선지에 물건을 포장해준다.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자온로 84
전화 : 041-833-9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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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당
과거 자온 양조장의 주인인 우씨 어르신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안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면정가이이안(眄庭柯以怡顔)’에서 따왔다. ‘뜰 앞 나뭇가지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 짓는다’ 라는 뜻이다. 현재 에어비앤비 숙박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넓은 대청마루와 마당, 5개의 방이 있어 워크숍 등으로 여러 명이 함께 숙박할 때 좋다.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자온로 53
전화 : 에어비앤비 홈페이지에서 예약
          041-834-8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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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나루터와 강변 산책길
해방 전후만 해도 200여 가구가 살았고, 시장과 선술집, 극장 등 번화가를 이루었던 부여 백마강변의 자온로 일대 규암마을. 수월옥 맞은편, 자온길이 끝나는 너머로 부여의 백마강이 흐른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피로를 풀고 싶다면 현재 유람선 선착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규암나루터에서 유람선을 타거나 강변 산책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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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집
오일장 한가운데에 있는 국밥집이었던 낡은 공간이 작은 공방숙소로 바뀌었다. 옷과 가방 헤어핀, 액세서리 등 여러 수공예 제품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공방 내 뒤쪽과 다락은 에어비앤비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침실 2개에 작은 다락방을 갖춘 복층 구조다.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수북로41번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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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북정
수북정은 조선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이 내려와 살면서 지은 정자다. 규암나루터 위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오를 수 있고, 정자까지 가는 길이 험하지 않다. 부여 8경 중 하나로 부소산과 백마강이 어우러진 멋진 경치로 유명하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나무 그늘과 강바람으로 더위가 무색한 곳이다.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수북로 76
추천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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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온길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자온로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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