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보기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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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돌며 사회 양극화와
지역 불균형의 해법을 찾다
지리경제학의 개척자, 이중환
한정주(역사학자)
조선 지리경제학의 효시, 《택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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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 표지
지리경제학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경제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 중 하나다. 지리적 조건, 그리고 환경과 산업의 연관성을 밝히는 문제는 치열한 시장 경쟁 속에 있는 국가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사안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일부 학자들은 화이론적(華夷論的) 역사관과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 전반을 해부했다. 실학자라 불리는 이들 가운데 우리 국토를 ‘실사’와 ‘실용’의 프리즘으로 바라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정약용과 이중환이다.
정약용은 역사적 관점에서 우리 국토의 영역과 범위를 규정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집필해 우리의 역사적 영토 개념을 한반도 밖 만주 대륙까지 확장시켰다. 반면에 이중환은 경제적, 사회적 관점에서 전국 8도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택리지》를 집필해 지역과 인물·산업·생산·소비·주거·인심 등의 상호 관련성을 밝혔다. 《아방강역고》가 이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인 역사지리서라면, 《택리지》는 지리경제서의 대표작이다.
특히 《택리지》는 이전 시대의 지리지나 지역 풍속지에서 다루었던 물산(物産), 즉 전국 각 지방의 산업과 생산품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자. 이 책만 하더라도 전국 8도의 생산 활동에 대해 단지 지역을 대표하는 토산품을 다루는 데 그치고 있다. 경기도 여주목의 토산품은 실, 쏘가리, 누치이고 평안도 용강현의 토산품은 삼, 옻, 조기, 상어, 농어라고만 밝히고 있다. 토산품이 생산되는 지역의 특성과 조건에 대한 분석이나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택리지》에서는 각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조건을 살펴보면서, 한 지역에서 특정 산업과 토산물이 발달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농업이 발달한 지역과 상업이 발달한 지역, 그리고 국제 무역이 발달한 지역을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 <팔도총론 경상도> 편의 상주와 <충청도> 편의 목계를 예로 들어 보자.
(문경의) 남쪽은 함창 들판이고, 함창의 남쪽은 상주다. 상주는 낙양이라고도 부르는데, 조령 아래 있는 큰 도회지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는 조령과 가까워 충청도 및 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에 접하고 있어서 김해나 동해와 통한다. 물품을 실어 나르는 말과 짐을 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 또는 육지로 모여든다. 따라서 이곳은 무역하기에 편리하다. - 《택리지》 <팔도총론> <경상도> 편
목계는 강 하류에 자리하고 있어서 생선을 취급하는 배와 소금을 다루는 배가 정박하고 외상 거래도 한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품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사고파는 일에 종사해 매우 부유하다. 목계 서편은 청룡사의 깊은 골짜기이며 서쪽으로는 원주와 경계가 맞닿아 있다. 동쪽으로는 북창에서 서쪽으로는 청룡사까지를 아울러 강북 마을이라고 부른다. 비록 강을 접하고 있어 경치가 뛰어나지만 땅이 모두 메말라 큰 강 남쪽에서 달천 서쪽까지의 기름진 땅에는 미치지 못한다. - 《택리지》 <팔도총론> <충청도> 편
상주가 농업과 상업이 두루 발전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면, 목계는 상업이나 운송업은 발달할 수 있지만 농업은 발전하기 힘든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얘기다.
이렇듯 이중환은 《택리지》 <팔도총론>과 <복거총론卜居總論>의 <생리(生利, 이익을 생산함)> 편을 통해 전국 8도 각 지역의 지리적 조건과 경제의 상호 관련성을 밝혀 놓았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리경제학의 지평을 연 개척자였다.
전국을 방랑한 끝에 《택리지》를 저술하다
이중환은 남인 명문가인 여주 이 씨 출신으로, 실학파의 선구자인 이익과 한 집안사람이다. 이익은 이중환보다 9살 연상이었는데, 친족 관계상 이중환은 이익의 재종손이다.
이익과 이중환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익은 일찍부터 이중환을 명석한 두뇌를 갖추고 글씨와 시문은 물론 여러 학문에 두루 밝은 박학다식한 인물로 보았다. 이중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이익의 학문 세계를 접하면서 실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중환은 《택리지》를 저술하는 과정에서도 이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택리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경제 분야에 관한 서술은 이익이 집필한 백과전서인 《성호사설》에서 모티브를 많이 얻었다고 한다. 현재 전해 오는 《택리지》의 일부 필사본 중에는 끝에 《성호사설》의 내용 일부가 부록 형식으로 실려 있기도 하다. 이중환이 《택리지》를 저술한 배경에는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접해 온 이익의 학문 세계, 즉 실학의 학풍이 자리하고 있었다.
《택리지》는 이중환이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찾아다니며 저술한 책이다. 그런데 그 직접적인 동기는 실학자로서의 포부보다는 개인적인 불행에서 비롯되었다.
이중환은 24세 때인 1713년(숙종 39)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관직에 나간 시기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남인, 소론, 노론 간의 당파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때였다. 그런데 경종을 거쳐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전 경종 시대에 있었던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서’가 문제가 된다. ‘목호룡의 고변서’는 경종 살해 음모가 있다는 혐의로 소론이 노론을 정치적으로 공박한 사건이었다.
영조가 즉위한 직후 노론은 고변서가 당시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을 모함했다는 대역무도죄를 물어 목호룡을 처형하게 했다. 평소 목호룡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했던 이중환 역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1726년(영조 2) 외딴 섬으로 유배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이중환이 유배지에서 벗어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는 그 후 정치적 재기의 길을 찾지 못한 채 몸을 의지할 곳을 찾아 전국을 방랑하고 다녀야 했다.
정치적 패배자였지만 명문 사대부가의 후손으로서 그 명맥이나마 유지하기 위해 살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던 이중환. 그가 개인적인 불행 속에서도 끝내 놓지 못한 끈은 바로 ‘실용과 실사’의 학문적 태도였다.
그는 30여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을 총정리해 8도의 지리적 조건 및 환경과 사회, 경제의 상호 연관성을 분석했다. 훗날 육당 최남선은 불행 속에서도 실학의 꽃을 활짝 피운 대학자에 대해 합당한 찬사를 남겼다.
“(《택리지》는) 우리나라 지리서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또한 인문지리학의 최초 발명이라고 할 만하다.”
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역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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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총론
《택리지》의 전체 내용 가운데 이중환의 경제 사상이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는 곳은 <복거총론>의 <생리> 편이다. 여기에서 그는 재물에 대한 욕망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양반 사대부 계층을 비판하면서 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왜! 재물과 재화의 이로움에 관해 논하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음식을 대신해 바람과 이슬을 먹을 수는 없고 깃털로 몸을 가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히 옷과 음식을 만드는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먹여 살려야 한다. 그러므로 재물과 재화의 이로움을 경영하여 넓히지 않을 수 없다. - 《택리지》 <복거총론> <생리> 편
이중환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헐벗고 빌어먹게 되어 조상의 제사도 받들지 못하고 부모를 봉양하지도 못하며 처자의 윤리도 모르면서 가만히 앉아 도덕과 인의만을 외치는 양반 사대부가의 허명을 벗어 던지고 의식주에 힘써 인간다운 삶의 방식을 개척하라고 주장한다. 또한 재물은 하늘에서 그냥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스스로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중환은 당시 양반 사대부들과는 다르게 재물에 대한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사대부일지라도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농업이나 상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가 전국 8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농업, 상업 경영 또는 국제 무역에 적합한 곳을 기록한 이유 역시 이러한 사상과 맞닿아 있다.
이중환은 지리와 경제가 결합하는 최적지로는 토지가 기름진 곳이 으뜸이며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상품 교역이 일어나는 곳이 그다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토지 문제를 다룰 때 그는 단순히 의식을 해결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토지의 비옥도와 경작 조건은 물론, 목면의 산지와 재배 조건, 특용작물 재배로 부를 축적하는 방식 등을 밝혀 농업 생산성의 향상과 상업적 농업 경영을 주장했다.
상업 경영에 있어서도 국내 상업뿐만 아니라 국제 무역의 요충지를 다루면서 큰 재물을 모으는 길은 중국이나 일본과 거래하는 국제 무역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양반 사대부가 직접 장사에 나설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생선과 소금이 통하는 곳을 살펴서 배를 두고, 거기에서 생기는 이득으로 관혼상제에 드는 비용을 보태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느냐?”라고 주장했다. 즉, 직접 상품을 사고 팔지는 않는다고 해도 각종 재화와 물품을 운반하는 배를 사고 경영하는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이렇듯 《택리지》에는 부에 대한 인식 전환을 역설한 이중환의 진보적인 경제 철학이 처음부터 끝까지 녹아 있다.
지리와 경제의 결합 하나, 농업으로 살 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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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도_변박그림
《택리지》에서 밝힌 농업 경영에 유리한 토지의 조건은 오곡을 가꾸기에 알맞고 목화를 가꾸기에도 알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환은 토지를 3등급으로 나누었다. 논에 볍씨 1말을 종자로 하여 60두를 거두는 곳이 가장 좋은 땅이고 40~50두를 거두는 곳은 그 다음이고 30두 이하를 거두는 곳은 농업으로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이중환은 조선 8도 중 농업 경영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남원과 구례, 그리고 성주와 진주 등을 꼽았다. 경상좌도는 땅이 메말랐지만 우도는 기름지다. 전라좌도의 지리산 주변은 땅이 기름진 반면에 해안가 마을은 물이 없고 가뭄이 잦다. 경상우도나 전라좌도는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경상좌도나 전라도 해안가 마을에서는 농사만 지어서는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한다. 충청도와 황해도는 땅이 기름진 곳과 메마른 곳이 반반이다. 하지만 강원도의 영동쪽 아홉 고을과 함경도는 땅이 더욱 메말라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다.
목화는 영남과 호남에서 가장 잘 재배되는데, 산골이나 바닷가 가릴 것 없이 목화 재배지로 적합하다. 반면에 강원도 영동에서 북쪽 함경도까지는 목화를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심는다 해도 자라지 않는다. 강원도에서는 오로지 원주와 춘천 근처의 들판에서 조금 자랄 뿐이다. 경기도에서도 한강 북쪽의 산골 마을은 산이 높고 물이 차가워 목화 재배에 알맞지 않다. 오직 개성에서만 목화가 많이 자란다. 황간, 영동, 옥천, 회덕, 공주가 목화 재배로는 첫째이고, 청주, 문의, 연기, 진천 등지가 그다음이다. 황해도 바닷가 고을은 목화 재배에 적합하지 않지만 산중이나 들판의 고을은 목화 재배에 알맞다.
이중환은 특용작물 재배지에 대한 기록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이는 상업적 농업 경영을 위한 것이었다. 먼저 조선에서 제일가는 재배지와 작물로 진안의 담배, 전주의 생강, 임천과 한산의 모시, 안동과 예안의 왕골 등을 예로 들면서 부자들이 이곳에서 나는 생산품으로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역을 잘 골라 특용작물 재배에 성공한다면 국내 최고의 재배지로서 이익을 독점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지리와 경제의 결합 둘, 상업으로 살 만한 곳
다음으로는 물품이 모여들고 배와 수레가 드나드는 상업의 요충로를 지리와 경제가 결합할 수 있는 적지로 꼽았다. 특히 이중환은 말(馬)보다는 수레, 수레보다는 배를 통해 물자를 교역하는 이익이 크다면서 수상 또는 해상로를 이용한 상업 활동을 강조했다.
동해는 바람이 높고 물살이 급해 경상도 동해 주변의 여러 고을과 강원도 영동 및 함경도의 배는 서로 교통할 수 있다. 하지만 서해와 남해의 배는 동해의 물살에 익숙하지 못해 왕래가 드물다. 반면에 서해와 남해는 물살이 느려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서울과 개성에 이르기까지 장사치의 왕래가 잇따르고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교통할 수 있다. 바닷길을 이용한 상업 활동은 동해에 비해 서해나 남해를 이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특히 바닷길을 이용하면서 강을 따라 내륙까지 물자를 운송해 교역할 수 있는 곳이야말로 상업 활동의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김해 칠성포, 나주 영산강과 영광 법성포, 흥덕의 사진포나 전주 사탄, 은진 및 강경, 개성에서 40여 리 떨어진 승천포, 평안도 평양의 대동강과 안주의 청천강 등이 모두 바다와 강이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운송과 상업의 최적지다.
김해 칠성포는 낙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병목 부분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북쪽으로는 상주, 서쪽으로는 진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칠성포는 경상도 전 지역의 출입구 역할을 하면서 남북으로 바다와 육지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관청은 물론 백성이 필요로 하는 소금까지 판매해 큰 상업 이익을 남길 수 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있는 은진과 강경은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이 모두 모여 물품을 거래하고 교역한다. 거기에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시장에는 먼 곳,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화물이 모여든다. 이 때문에 은진과 강경은 1년 내내 물자가 넘쳐나고, 크고 작은 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구에 늘어서 있는 큰 도회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중환은 정작 물길과 배편으로 장사를 해 큰 이익을 남긴 곳은 서울이라고 지적했다. 이곳에는 바닷길과 한강을 통해 온 나라의 물자를 운송하는 배들이 모여서 큰 이득을 얻어 부자가 된 사람이 많다.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이 변 부자에게 돈 1만 냥을 꾸어 몇 십 배로 불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전국의 물길과 배편을 이용하는 상업 활동이 있었다.
상업 활동에 종사해 큰 이득을 얻으려고 한다면 바닷길과 내륙으로 통하는 강이 이어져 있는 병목지가 가장 적합하다. 그 중에서도 한강과 서해 바닷길을 이용한 교역이 가장 큰 이득을 준다. 이것이 이중환이 전하는 요지이다.
지리와 경제의 결합 셋, 국제 무역으로 살 만한 곳
농업 경영과 상업 활동으로 재물을 모을 수 있는 지역을 거론한 다음에 이중환은 국제 무역으로 살만한 곳을 밝혔다. 그런데 농업이나 상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재물을 안겨주는 곳이 국제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분석했다.
밑천이 많이 드는 큰 장사는, 한 곳에 있으면서 재물을 통해 남쪽으로는 일본과 무역하고 북쪽으로는 중국의 연경(북경)과 무역하는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물자를 실어 날라 간혹 수백만금의 재물을 모은 사람도 있다. 이러한 부자는 서울에 가장 많고 다음이 개성, 그다음이 평양과 안주다. 이들은 모두 중국의 연경과 통하는 요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 이익은 배를 통해 얻는 이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삼남 지방에는 이러한 부자가 없다. - 《택리지》 <복거총론> <생리> 편
이중환은 18세기 조선에서 가장 큰 이득을 안겨주는 상업 지역을 중국과 교통하는 국제 무역로에 자리하고 있는 서울, 개성, 평양, 안주라고 보았다. 이곳에 사는 상인들은 경강상인, 개성상인(송상), 평양상인(유상), 의주상인이라는 거대 집단을 형성해 역관을 밀어내고 국제 무역의 상권을 장악하면서 18세기 조선 최대의 갑부로 자리 잡았다. 이외에 거대한 재물을 안겨준 국제 무역의 거점이 또 있었다. 경상도 밀양과 동래였다.
(밀양은) 강을 끼고 있고 바다와 가까워 생선과 소금을 배로 통상하는 이익이 있어 번화한 도회지를 이루었다. 서울 역관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엄청난 재물로 왜국 사람들과 장사해 많은 이익을 얻었다. 밀양 동남쪽이 동래인데, 이곳은 동남쪽 바닷가에 있어서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첫 경계이다. 임진년 이전부터 남쪽 바닷가에 왜관을 짓고 둘레 수십 리에다 나무 울타리를 쳐서 경계로 삼았다. 병사를 세워 지키도록 하고 나라 사람들이 드나들며 교제하는 일을 엄격하게 금했다. - 《택리지》 <팔도총론> <경상도> 편
개성이나 평양 등이 중국과의 무역 거점이었다면 밀양과 동래는 일본과의 무역 요충지였다는 이야기이다. 이곳을 거점 삼아 통역을 담당한 왜역관이나 동래상인들은 일본인들과 교역을 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이중환의 지적에 따르면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되기 위해서는 농업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낫고 상업 중에서도 국내보다는 국제 무역에 나서는 것이 더 나았다.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서는 의주나 개성 등을 거점으로 삼아야 하고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서는 밀양이나 동래를 거점으로 삼아야 했다.
이중환의 지리경제학이 남겨 놓은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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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18세기 조선경제학자들의 부국론)
저자 한정주 지음
출판사 다산초당(다산북스)
후대에 이중환의 사상적, 학문적 계보를 이은 학자나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중환이 매우 불우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택리지》는 《팔역지八域誌》,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 《복거설卜居說》,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등 수많은 다른 이름의 필사본으로 널리 읽혀져 왔다. 하지만 그동안은 인문지리서, 더욱 심하게는 풍수지리서 정도로 이해되어 왔다. 《택리지》가 담고 있는 이중환의 사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보여준 사상은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전략과 계획을 담당하는 정책 입안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책상머리에서 벗어나 전국 방방곡곡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각 권역별 또는 지역별로 경제 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특성화 전략을 세우라는 권고다. 만약 이중환이 전하는 메시지를 충실히 실천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 양극화, 즉 계층 간 또는 지역 간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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