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유산에서 예술도시로,
낡은 기계가 멈춘 자리에 이제는 음악과 웃음이 흐른다. 한때 쉼 없이 돌아가던 공장 내부는 더 이상 소음을 내지 않지만, 그 대신 사람들의 발걸음과 이야기, 그리고 예술의 숨결이 공간을 채운다. 전북 전주 팔복동 산업단지 한편에 자리한 팔복예술공장은 그렇게 ‘멈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공간이다. 전주를 떠올리면 한옥의 고즈넉한 풍경이 먼저 스친다. 그러나 도시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과거 산업의 중심지였던 팔복동은 이제 또 다른 얼굴로 살아나고 있다. 공장의 기억 위에 새로운 시간이 겹쳐지며, 전주의 현재를 입체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제 산업의 기억 위에 예술이 흐르는 전주 팔복동으로 떠나보자.
글. 박시은 사진. 한국관광공사, 전주시·전주문화재단
산업에서 문화로, 시간을 잇는 재생의 시작
워크맨과 마이마이가 일상이던 시절, 카세트테이프는 우리의 일상과 가장 가까운 매체였다. 전북 전주 팔복동에 자리한 이곳은 1979년 설립된 ㈜쏘렉스 공장으로, 한때 아시아 전역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수출하던 생산
거점이었다. 공장 내부는 늘 기계 소리로 가득했고, 500여 명의 노동자가 이곳에서 생산의 시간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CD의 등장과 산업 구조의 변화 속에서 공장은 1991년 문을 닫았다. 이후 25년 동안 이 공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전환점은 ‘문화’였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사업을 통해 이곳은 ‘팔복예술공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기존 산업시설의 구조와 흔적을 보존한 채 새로운 기능을 더하며, 산업의
시간을 문화의 시간으로 이어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2019 아시아 도시경관상’ 수상으로 이어지며, 산업유산을 문화 자산으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산업의 흔적 위에 다시 설계된 공간
공장이 멈춘 자리에 새로운 공간이 들어섰다. 팔복예술공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시간의 질감’이다.
붉은 벽돌과 거친 콘크리트 벽면, 녹슨 철제 구조물과 높이 솟은 굴뚝까지. 이곳은 과거 공장의 골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덧칠하거나 지우기보다 남겨진 흔적 위에 새로운 쓰임을
더하는 방식이다.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복도와 공장 사이를 잇는 브릿지, 탁 트인 옥상 공간은 산업시설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현재의 시선으로 재해석된다.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 동선은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곳을 걷는 일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시간의 결을 따라 걷는 경험에 가깝다. 낡은 배관과 벽면,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작품들은 서로를 지우지 않고 공존하며 공간의 깊이를 만든다.
이러한 변화는 건물 안에 머물지 않는다. 팔복예술공장을 중심으로 팔복동 일대에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전시와 프로그램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산업단지의 풍경에도 점차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 산업의 중심지였던 공간은 이제 문화와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 다시 기능하고 있다. 산업의 흔적 위에 더해진 예술은 공간을 바꾸고, 그 변화는 다시 도시의 풍경을 바꾼다.
창작과 참여가 공존하는 예술 플랫폼
이곳에서는 지금도 새로운 창작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팔복예술공장의 핵심은 예술가의 창작과 시민의 참여가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단순히 전시를 감상하는 공간을 넘어 예술이 만들어지고 확장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그 중심에는 상주 작가들이 활동하는 ‘창작스튜디오’가 있다.
매년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입주 작가들은 이곳에서 약 1년간 머물며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한다.
전주문화재단은 창작 공간 제공을 넘어 비평가 매칭, 리서치 투어, 국내외 교류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며 작가의 성장을 돕고 있다. 이러한 지원은 창작 활동의 기반을 넓히고, 지역 예술 생태계를 확장하는 역할로
이어진다.
특히 ‘오픈 스튜디오’ 기간에는 평소 공개되지 않던 작업실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작가와 관람객이 직접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창작의 과정 자체가 하나의 경험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또한 지역 전략 산업인 탄소를 예술과 결합한 ‘탄소예술기획전’은 기술과 예술의 융복합을 시도하는 사례로, 팔복예술공장의 실험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전국 1호 ‘꿈꾸는 예술터’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유아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세대를 대상으로 한 참여형 예술교육이 운영되며, 일상 속에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일상 속에서 완성되는 문화 경험
공간의 경험은 때로 일상의 순간에서 완성된다. 팔복예술공장 한편에 자리한 ‘카페 써니’는 과거 공장 식당을 개조한 공간이다.
지역 주민이 운영에 참여하며, 공간의 역사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카페 내부에는 생산일보와 근태 현황판 등 공장의 흔적이 남아 있어 차 한 잔의 여유 속에서도 이곳이 지나온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카페와 연결된 그림책방과 체험 공간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바닥과 벽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은
예술을 놀이처럼 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온밥상’ 팔복점에서는 전주의 대표 음식과 다양한 식사를 즐길 수 있어 공간에서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상의 식탁으로 이어진다.
팔복예술공장은 머무는 시간조차 하나의 경험이 되는 공간이다. 전시를 보고, 공간을 걷고, 쉬어가는 일상의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문화 경험을 완성한다.
팔복예술공장은 멈춰버린 시간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가치를 더해온 공간이다. 이곳에는 과거 산업을 이끌던 노동의 기억과 현재의 문화가 함께 머물고 있다. 공장의 흔적과 예술은 서로를 대체하지 않고 공존하며, 하나의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을 쌓아간다.
산업의 기반 위에 문화가 더해지며 만들어진 변화는 단순한 공간의 재생을 넘어 도시가 스스로를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 된다.
전시와 축제로 이어지는 팔복예술공장
팔복예술공장은 공간의 재생에 그치지 않고, 전시와 축제를 통해 문화적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 특별전을 시작으로, 앙리 마티스와 라울 뒤피 전시가 이어지며 전주 시민들에게 세계적인 수준의 예술 향유 기회를 제공했다.
올해는 한불수교 140주년과 전주문화재단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마르크 샤갈’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는 오는 6월 21일까지 이어지며, 색채와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통해 관람객에게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공간의 변화는 축제로도 이어진다. 매년 개최되는 ‘전주예술난장’과 미래문화축제 ‘팔복’은 전통문화와 현대 예술, 미디어 아트를 결합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지난해에는 ‘팔복팔경’을 주제로 다양한 공연과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약 3만 5천 명의 방문객이 찾았다.
전시와 축제를 통해 팔복예술공장은 일상적인 공간을 넘어 도시 전체의 문화 흐름을 만들어 가는 거점으로 자리하고 있다.